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레드릭 더글러스 (문단 편집) === 해방과 선거권을 위한 싸움 === 이 와중에 1861년 노예제 폐지를 두고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 중 하나였던 더글라스와 그를 비롯한 많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미국의 흑인들이 그들의 자유를 위해 참전해야함을 촉구했고, 이에 많은 흑인들이 [[북부]]군이 되어 참전하였다. 1862년, [[에이브러햄 링컨|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자 그는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우리는 하늘에서 번개가 치길 귀 기울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날의 새벽별에서 비추는 희미한 빛을 통해서 우리는 보고있었습니다. 우리는 수백년간 고통속에서 해온 기도의 답을 백년동안 기다렸습니다."'''라고 회상하였다. 북부의 흑인들이 비로소 자유를 찾자 그는 남부의 흑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제54 [[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54th Massachusetts Volunteer Infantry)의 [[신병]] 모집자로써 일하기도 하였으며 그의 아들들 또한 군복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남북전쟁]] 참전으로 투표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 더글라스는 기대와는 다르게 링컨 대통령이 흑인의 투표권 보장에 미진하고, 실제로 흑인 인권이 별반 달라지는게 없자 실망하고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존 C. 프리몬트를 지지하기까지 한다. 이후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더글라스는 링컨 대통령 이후 연이어 5대 미국 대통령의 자문역으로 활동했고, 1871년 [[율리시스 그랜트]]가 상원 의원들에게 [[도미니카 공화국]]을 미국 주로 편입하자고 설득하려 도미니카 합병의 유용성 조사를 위해 구성한 산토 도밍고 위원회(Santo Domingo Commission)의 보좌로 일하기도 한다. 1877년부터 1881년까지는 컬럼비아 특별구 경찰서장을, 1881년부터 1886년까지는 컬럼비아 특별구의 기록관으로, 1889년부터 1891년까지는 주 아이티의 공사 등을 역임했다. 1894년, 프레더릭 더글라스는 미국의 사형에 대해 규탄을 하는 내용으로 마지막 연설 "The Lessons of the Hour"를 발표하고 1년 뒤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 그의 관은 뉴욕 로체스터의 Mount Hope Cemetery에 묻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